[책마을] 달콤함이 부른 비극…설탕의 쓰디쓴 역사

입력 2024-01-12 18:16   수정 2024-01-13 00:52


길쭉한 사탕수수를 잘라 압착하면 즙이 나온다. 풀 향기가 살짝 나는 달콤한 액체다. 오래전 인도 사람들은 이 즙을 끓여 덩어리로 만들어 몇 달 동안 보관했다. 구르(gur)라 불렀다. 겨울이면 아침 쟁기질을 하러 밭에 나가기 전 한 덩어리씩 먹었다. 기진맥진한 순례자들도 이 구르를 얻어먹고 기력을 회복했다.

황갈색 덩어리의 정체는 설탕이다. 시간이 흐른 후 이를 정제한 백설탕도 만들어졌다. 설탕은 수백 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사치품이었다. 맛있는 설탕을 남녀노소, 계층에 상관없이 세계인 모두가 먹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는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 바로 노예무역이다.

<설탕>은 설탕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2500년 동안 설탕이 어떻게 우리의 정치, 건강, 환경을 바꿨는지 보여준다. 책을 쓴 윌버 보스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자유대 교수이자 국제사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다. 그는 “설탕의 역사는 비인간적인 폭력과 생태계 파괴, 대항 운동, 저항, 항의, 여러 설탕 생산자 간의 파멸적인 전쟁으로 가득하다”며 “그렇지만 동시에 엄청난 창의성과 기업가정신, 낙관론의 역사이기도 하다”고 했다.

설탕은 소금보다 만들기가 훨씬 어렵다. 오늘날에는 커다란 압착기와 보일러, 원심분리기를 갖춘 거대한 공장에서 엄청난 양의 사탕무나 사탕수수를 불과 몇 시간 만에 흰색의 결정질 설탕으로 바꿔놓는다. 하지만 이런 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 설탕 생산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무더운 지역에서 작물을 심고 가꾸고 수확한 다음, 즙을 짜내고 끓여서 설탕으로 만들었다.

설탕 재배 때문에 노예제가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노예제는 설탕 재배와 만나 급격하게 성장했다.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노예가 됐다. 배에 태워져 서인도제도로 보내졌다. 항해에서 살아남는 1250만 아프리카인 가운데 3분의 2가 사탕수수 농장으로 끌려갔다. 쇠약해진 상태로 도착한 그들은 굶주림과 장시간의 고된 노동 속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수확하고 가공했다. 잔인한 처벌과 고문도 일상이었다.

이런 참상은 유럽에 전해져 18~19세기 노예제 폐지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사람의 피가 묻은 설탕을 먹을 수 없다”는 팸플릿이 나돌았다. 수십만 명이 청원한 끝에 영국 의회는 1807년 노예무역을, 1833년에는 노예제를 폐지했다. 하지만 영국 통치령 밖에선 여전히 노예들이 사탕수수를 생산했다.

그렇게 브라질과 쿠바 등에서 생산된 설탕은 가격이 더 저렴했기에 영국인들도 이를 대량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까지도 유럽과 미국인들이 소비한 설탕의 절반은 여전히 노예들이 생산한 것이었다.

돌파구는 산업적 혁신에서 나왔다. 산업혁명의 바람을 타고 증기로 사탕수수를 분쇄하는 기계가 발명됐다. 과학자들은 사탕수수 말고 다른 곳에서 설탕을 얻을 방법이 없나 연구했다. 포도 등에서 설탕 추출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결국은 사탕무에서 설탕을 얻는 방법을 알아냈다.

책은 노예제 말고도 설탕과 관련한 여러 문제를 지적한다. 단일 작물을 재배하면서 토양이 황폐해지고, 무성한 열대우림이 황무지로 변했다고 지적한다.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의 에너지 보충을 위해 칼로리만 높이는 설탕이 많이 첨가됐다고도 했다. 저자는 “식품과 음료에 과도한 설탕 첨가를 금지하는 것은 절실히 필요한 변화의 시작”이라며 “이는 소비자의 돈을 아껴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건강과 환경을 크게 개선할 것”이라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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